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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스토리
밴쿠버에서 일자리를 구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땅에서 키워지고 교육받은 1.5세나 2세 역시 높기만 한 취업 문턱 앞에서 한숨을 지을 때가 많다. 좀 더 암울하게 얘기하자면 “이력서를 100통이나 보냈는데 면접하자는 연락조차 받아본 적이 없어요”라는 하소연 또한 낯설지 않다. 일터를 찾는 게 왜 이리 힘들어진 것일까? 문두진씨(사진)를 만나기 전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이다. 그는 “냅캐나다”(Nav Canada)에서 기술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보장된 미래 대신 밴쿠버를 선택하기까지” 냅캐나다는 캐나다 교통부(Transport Canada)에서 항공 관리 부문만을 따로 떼어내 만든 공기업으로, 한국의 공항공사와 비슷한 조직이다. 공공 기관인 탓에 직원들의 고용 안정성도 매우 높고 급여 수준..
특정한 사실을 공적으로 증명하는 행위, 즉 공증은 적어도 새 이민자들에게 있어서는 꽤나 익숙한 단어다. 공증이라는 절차를 통해 한국에서의 경력 혹은 학력 등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위임장을 보내거나 영주권 카드를 다시 발급받아야 할 때도 공증은 필요하다. 이쯤 되면 공증은 마치 우리네 일상 생활의 한 부분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증사(Juris Notary)는 비교적 낯선 직업이다. 영사관 등에서 공증 업무를 해결해 봤던 사람들은 “공증사가 대체 뭐지?”라며 의아해 할 지 모른다. 어떤 이는 공증사의 필요성에 대해서조차 의문을 나타낼 수 있겠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곳 BC주에서 공증사는 위임장 위에 단순히 도장 하나 눌러주는, 그런 일만을 취급하지 않는다. 법적 다툼이 필요하..
한인 2세 사이에서 의사나 약사는 꽤 흔한 장래 희망에 속한다. 그 꿈이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것이든, 아니면 스스로의 결정에 따른 것이든 말이다. 의료인의 길을 가겠다는 것은 어느 면에선 분명 현명한 선택처럼 보인다. 상대적으로 느슨한 인맥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이민자를 구직 시장의 스타로 각광받게 해 줄 수 있는 무기가 바로 “전문 기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료 전문직의 꿈을 꾸고 있는 모두가 하얀 가운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노력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려면 공부만 잘해서도 곤란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직 약사이자 의대생(UBC)인 김홍찬씨(사진)가 그 질문에 답한다. “10학년까지 성적은 평범 그 자체, 공부는 악으로 했다” 김홍찬씨의 일상에서 한가로움을 찾는 것은 쉽..
몇몇 처세술 책들의 주장처럼 성공을 위한 공식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마다 성공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인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 친구 딸이 말이야”라고 시작되는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다. 애니 장(한국명 장유정)씨에 대한 소문을 들은 후부터 줄곧 들었던 생각이다. “아무리 좋은 학교 나와도 일한 경력이 없다면…” 애니씨의 이른바 “스펙”은 현실 세상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 맥길 대학교를 3년만에 졸업했고, 같은 대학의 석사 과정을 마치기까지는 불과 1년 6개월이 걸렸다. 줄곧 공부에만 매달린 것도 아니다. 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된 나이가 된 이후부터, 아르바이트와 함께 하는 삶이 시작됐다. 대학에 가서도 그녀는 시간을 쪼개 커피 전문점이나 옷가게 등에서 계속해서 일했..
처음으로 식당 창업을 염두에 둔 사람이라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있을런지 모른다. 그래서 업계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묻고 또 묻는다. 가게 하나 여는데 보통 얼마 정도 필요한가요? 작은 돈으로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음식 장사로는 뭐가 있지요? 임대료는 얼마나 해요? 그거 팔아서 먹고 살 수는 있나요? 스시롤 딱 두 종류만을 팔던 자그마한 가게를 시작한 후 일식집, 뷔페 식당을 연달아 안착시킨 정재창씨(사진)에게도 창업 희망자들의 질문은 당연히 쏟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물음표를 지워줄 숫자들은, 적어도 그가 제시한 답변집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가려운 곳에 적용할만한 효자손 대신, 정재창씨는 자신의 인생사부터 담담히 털어놨다. 그 안에 식당 창업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혹..
이민 사회에서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선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저마다의 시각에 따라 주류 혹은 비주류의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행복은 계량화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주류와 비주류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낯선 캐나다 사회에 안착하려는 새 이민자의 노력은, 그것이 소위 주류사회 편입을 위한 갈망이든 아니든 간에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다. 그리고 주류 입성의 순간이 “자신을 100% 연소시킨 댓가로 기존 토착민들만이 점유하던 권리를 새롭게 누리게 됐을 때”로 정의될 수 있다면, 한인사회에도 분명 좋은 본보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약 반세기 동안 캐나다의 의사로 살아온 신두호 박사(72세·사진)가 그 중 한 명이다.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1968년..
“처음엔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그녀가 피아노 건반을 처음 눌러본 건 겨우 네 살 때의 일이었다. 조기교육에 사활을 건, 열성 부모를 둔 탓이 아니었다. 딱 3년 터울의 남동생이 울음 소리와 함께 세상에 출생 신고를 하기 전후부터, 그녀는 피아노 학원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어머니 한현진씨의 얘기다. “한국에 살고 있을 때였어요. 둘째 낳기 전 여울이를 봐줄 때가 필요했는데, 그때만 해도 네 살짜리 아이를 보낼만한 곳이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알음알음으로 찾게 된 곳이 피아노 학원이었어요.” 피아노를 시작하게 된 뭔가 거창한 이유 같은 것은 없었지만, 건반 앞의 아이는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다른 친구들보다 진도가 훨씬 빨랐다. 그녀의 첫 피아노 선생님이 엄마에게 말했다.“여울이…, 피아..
통장의 잔고 수위가 어느 높이쯤 돼야 평균적인 인간들은 평범하게 행복하다 말할 수 있게 될까? 최근 리치몬드에 ‘한옥’이란 한식당을 연 이명순씨가 이 질문에 답한다. 반듯한 사장님 ‘맨바닥’부터 다시 시작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얘기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 혹은 한국에 있을 당시 지녔던 명함에 여전히 집착하는 사람들은 이명순씨 앞에서는 자기자랑을 잠시 접는 게 좋을 듯 싶다. 왠지 억척스러움이 느껴지는 그녀는 서울과 경기도에서 예식장 몇 곳을 운영하던 반듯한 사장님이었다. 사업을 대충 접고 97년 밴쿠버에 처음 정착했을 때만 해도 경제적으로는 큰 모자람이 없었다. “처음 이민 오고 나서 만 5년 동안을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한국에서 벌어놓은 돈으로 생활했던 거죠. 그러다 다시 한번 사업..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독 앳된 얼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스스로를 “이번에 UBC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게 된 제임스 천(한국명 천현석·사진)”이라고 소개하는데, 그 말이 반농담처럼 들릴 정도로 어려 보였다. 나이를 물었더니 “열네 살”이라고 했다. UBC에서 제공하는 유니버시티트랜지션프로그램(University Transition Program, UTP)을 이수한 덕분에, 7학년 후 5년 과정을 2년만에 끝낼 수 있었다고 천군은 말했다. 한마디로 월반에 월반을 거듭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영재'로 분류됐을 이 소년은 자신의 성과가 그리 대단한 건 아니라는 눈치다. “매년 20여 명의 학생이 UTP 대상자로 선발되는데, 저는 그들 중 한 명일 뿐이었어요.” 두뇌가 매우 명석했을 거라고 묻자, 10대 중반..
맥주는 평범함에 가까운 술이다. 경제력에 따라 마실 수 있는 술의 등급이 달라지는, 그래서 애주가의 심리 상태를 뻘쭘하게 만드는 양주, 꼬냑, 와인 등과는 그 태생부터가 다르다. 서민들도 맥주잔 앞에서는 빈주머니에 대한 걱정에서 한결 자유로워진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맥주는 “평범해서 도리어 매력적인 술”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이 이를 이해하고 있는 축에 속한다면, 밴쿠버에 살고 있다는 것이 아마 행복하게 느껴질 것이다. “오카나간은 와인투어, 밴쿠버는 맥주투어”라는 얘기가 돌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바로 이 도시에서 경험할 수 있어서다. 밴쿠버, 그 중에서도 다운타운을 대표하는 수제맥주점 두 곳을 탐방했다. David Leong/flickr(cc) 수제맥주점의 원조, 이곳이 술익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