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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스토리
어김 없이 연말이다. 거리에서 혹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캐롤송에, 종교의 벽과는 상관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습관처럼 마음을 여는 시기다. 음악이라는 것이, 이래서 놀랍다. 형편 없는 사람들이 종종 차별의 근거로 제시하는 종교, 인종, 주로 사용하는 언어 등도 음악을 즐기는 데 있어서는 그닥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음’(音)에는 누구나 ‘즐겁게’(樂) 반응할 수 있어서다. 줄리어드 음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밴쿠버에서 활동 중인 클라리넷 연주자 이경원씨와 음악이 줄 수 있는 선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뉴욕에서의 음악 생활, 배수의 진을 쳤더니….”이경원씨에게 음악은 처음부터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아버지는 클라리넷 연주자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다. 이게 다가 아니다. 형은 대학에서 오보에..
얼마 전 만난 한 노신사는 가끔씩 가슴이 먹먹하다고 한다. 밴쿠버에 정착한 지 수십년이 지났건만, 어쩌다 한번씩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 같은 것이 느껴져서다. 이곳에서 태어나 그리고 지금은 장성한 아들 녀석에게 “넌, 어느 나라 출신이니?”라고 누군가 묻는 것을 볼 때마다, 시민권만 있을 뿐이지 나는 영원히 캐나다인은 될 수 없을 거란 생각마저 든다. 낯선 것도 대개의 경우에는 시간과 함께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새 운동화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발과 친숙해질테고, 새 직장의 책상도 언젠가는 ‘내 것’이라는 생각에 전혀 어색하지 않다. 거리의 간판도, 길에서 눈이 마주친 이들에게 ‘하이’하며 인사하는 것도, 식당에서 밥을 먹은 뒤에는 팁을 남겨두는 것도 일상이 된다. 그런데도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이방인이..
한류는 뭔가 있어 보이는 남자 배우들의 일본 진출과 함께 시작됐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강남스타일’을 통해 마침내 전세계 곳곳에 인식됐다. 이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년을 살짝 웃도는 정도다. 확실히 한류라는 신조어 속에서는 한국 대중문화의 숨가쁠 정도로 빠른 성장속도가 느껴진다. 마치 한강의 기적이 한국 경제의 쾌속 질주를 상징하는 것처럼.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말 그대로 눈부신 성장이 온통 장밋빛으로만 장식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발전은 풍요 뿐 아니라 쓰린 부작용도 품고 있었다. 제 32회 밴쿠버국제영화제(VIFF)에 초대된 이학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는 한류의 화려한 무대 저편에 숨겨진 속살을 조명한다. "다큐멘터리는 ‘있는 그대로’에 대한 감독의 해석이다" 영화는 대한민국의 5대 ..
일과 성공, 이 두 단어가 곧바로 행복으로 해석됐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더 행복해지고 싶었고, 그래서 휴식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렸다.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정비 한번 제대로 받지 않은 채 휘발유만 꿀꺽꿀꺽 섭취한 자동차가 언젠가는 탈이 나듯, 강철로 만들어졌을 것 같은 이 사람의 엔진도 시간과 함께 서서히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건강이 나빠졌다. 낡은 부품을 교체해 주어야 할 시기를 살짝 건너뛸 수는 없었다. 산책에 맛을 들인 건 바로 이 때다. 산에 오르는 것은 자신이 없었지만, 평지는 한참을 걸어도 별로 지치지 않았다. 건강해지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마치 걷기에 중독된 것처럼. 첫 산책코스는 집 앞 공원이었다. 그러다가..
딴짓하는 아이는 걱정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이런 아이의 세계 속에서는 사회에서 정한 '중요도의 순서'가 뒤죽박죽 섞여 버리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에를 들어 학교 숙제는 뒷전이고, 대신 쓸 데 없어 보이는 일에 아이는 더 관심을 둔다. '유니버시티트랜지션프로그램'(University Transition Program)을 통해 올해 UBC에 입학한 제임스 천(한국명 천현석·응용과학 1년)군도 그랬다. 천군의 현재 나이는 열네 살, 여전히 소년이다. 천군의 아버지인 천영주씨와 어머니 성은숙씨를 만났다. 영재를 키운다, 유니버시티트랜지션프로그램이란? '딴짓하는 현석이'의 가능성은 초등학교 때 만난 '완고한 선생님'에 의해 발견됐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불러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현..
몇몇 처세술 책들의 주장처럼 성공을 위한 공식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마다 성공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인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 친구 딸이 말이야”라고 시작되는 이야기를 꺼내야 할 것 같다. 애니 장(한국명 장유정)씨에 대한 소문을 들은 후부터 줄곧 들었던 생각이다. “아무리 좋은 학교 나와도 일한 경력이 없다면…” 애니씨의 이른바 “스펙”은 현실 세상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 맥길 대학교를 3년만에 졸업했고, 같은 대학의 석사 과정을 마치기까지는 불과 1년 6개월이 걸렸다. 줄곧 공부에만 매달린 것도 아니다. 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된 나이가 된 이후부터, 아르바이트와 함께 하는 삶이 시작됐다. 대학에 가서도 그녀는 시간을 쪼개 커피 전문점이나 옷가게 등에서 계속해서 일했..
이민 사회에서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선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저마다의 시각에 따라 주류 혹은 비주류의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행복은 계량화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주류와 비주류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낯선 캐나다 사회에 안착하려는 새 이민자의 노력은, 그것이 소위 주류사회 편입을 위한 갈망이든 아니든 간에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다. 그리고 주류 입성의 순간이 “자신을 100% 연소시킨 댓가로 기존 토착민들만이 점유하던 권리를 새롭게 누리게 됐을 때”로 정의될 수 있다면, 한인사회에도 분명 좋은 본보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약 반세기 동안 캐나다의 의사로 살아온 신두호 박사(72세·사진)가 그 중 한 명이다.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1968년..
1995년 12월 24일, 서울 무교동 코오롱 빌딩에 자리 잡은 캐나다 대사관 안. 예술가 자격으로 캐나다 이민을 신청한 한 화가와 그의 아내, 그리고 1년 차이로 태어난 이들의 어린 두 딸이 영사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자 심사를 위해서다. 얼마나 지났을까. ‘들어오세요’라는 말에 남편이 먼저 일어섰다. 영사는 남은 셋에게도 손짓을 했다. 심사는 신청인만 받으면 되는 걸로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담당 영사는 유난히 키가 큰 여자였다. 이 낯선 얼굴은 화가가 제출한 포트폴리오를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저는 이 그림이 제일 좋은데요”라고 말했다. 자기네 땅에서 살아도 된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이젠 됐군,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화가의 아내에게 질문이 주어졌다. “당신은 캐나다에 가면 무슨..
‘CN 캐나다 여자 오픈’의 막이 올랐다. 밴쿠버 그린의 정복자가 결정되는 것은 오는 26일이다. 청 야니, 스테이시 루이스, 크리스티 커 등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선수들이 이번 대회에 출전한다. LPGA에서 막강 화력을 과시하고 있는 한국(계) 여전사들의 플레이도 만끽할 수 있다. 최나연, 박인비, 유소연, 미셸 위 등이 우승 사냥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능숙한 사냥꾼들 사이에서 유독 앳된 얼굴이 눈에 띈다. 주인공은 고보경양(영어명: 리디아 고)으로, 이번 골프 축제의 최연소 출전자다. 고양은 6세 때 부모를 따라 뉴질랜드에 정착했으며 현재 나이는 만 15세, 말 그대로 ‘소녀’다. 21일 코퀴틀람 한 한식당에서 고보경양을 만났다. 이날 자리는 밴쿠버 한인회가 마련했으며, 이용훈 회장..
그는 승려였다. 그것도 꽤나 유명한 승려였다. 성직자의 신분으로 세계 곳곳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덕분에 강단에까지 서게 됐지만, 이것만이 유명세의 배경은 아니었다.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대학…, 그곳 졸업장보다는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세상이 그에게 신호를 보낸 이유였다. 그는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거친 산맥과 사막을 통과했다. 때로는 내전 지역 한복판에 이 자전거가 서 있기도 했다. 당시의 경험은 (2001년, 마당넓은집), (2006년, 민음사) 등의 책을 통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사막”과 “유라시아”를 견뎌냈던 그의 자전거가 얼마 전 대륙 너머 이곳 밴쿠버에까지 흘러 들어왔다. 그는 말했다. “지난 4년간 1년은 배낭여행으로, 나머지 3년은 자전거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