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스토리
제주 올레 서명숙 이사장 본문
일과 성공, 이 두 단어가 곧바로 행복으로 해석됐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더 행복해지고 싶었고, 그래서 휴식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렸다.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정비 한번 제대로 받지 않은 채 휘발유만 꿀꺽꿀꺽 섭취한 자동차가 언젠가는 탈이 나듯, 강철로 만들어졌을 것 같은 이 사람의 엔진도 시간과 함께 서서히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건강이 나빠졌다. 낡은 부품을 교체해 주어야 할 시기를 살짝 건너뛸 수는 없었다. 산책에 맛을 들인 건 바로 이 때다. 산에 오르는 것은 자신이 없었지만, 평지는 한참을 걸어도 별로 지치지 않았다. 건강해지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마치 걷기에 중독된 것처럼.
첫 산책코스는 집 앞 공원이었다. 그러다가 더 멀리, 더 오래 걷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결국 도보여행자들이 한번쯤 고개를 돌린다는 산티아고의 문까지 두드리게 된다. 그곳에서의 걷기는 36일 동안 계속됐다. 그리고 그 여행의 끝에서, 일과 성공 쪽으로만 향해 있던 자신의 나침반 바늘이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길에서 잊고 지내던 ‘자아’와 진심으로 조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인 서명숙씨가 풀어놓은 얘기다.
절실한 마음으로 찾은 산티아고
그곳에서 삶의 또 다른 모습을 보았다
서명숙씨는 기자 출신이다. 정치부 기자로 시작해 시사저널 편집장,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등을 거쳤다. 이력만 보면 언론인으로서 밟은 길이 꽤 순탄해 보인다. 하지만 그 길을 걷는 내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기자로서 필드를 뛰어다녔던 시절, ‘온전한 쉼’이란 단 한 차례도 없었던 것 같다. 휴가 신청하는 후배 기자에게 눈총을 줬을 정도였으니, 자기 자신을 챙길 여유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
“한마디로 생존하기 바빴죠. 일 이외에는 많은 것을 잊고 지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아요. 기자로서 25년을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무너진 거죠. 평생 특종만 쫓아다니며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에 회의감 같은 것도 들었고···.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표를 낸 거에요.”
스스로 편집장 자리에서 내려온 후 그녀는 몸과 마음을 추스릴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걷기 시작했다. 이제껏 경험한 것과는 사뭇 다른 길이었다. ‘기자로서의 길’에서는 쉬어 갈 간이의자 하나 챙기지 못했지만, 직함을 버리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다. 느리게 걸어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 하지 않았다. 숱하게 걸었던 길들 중 하나가 바로 산티아고다.
“처음 산티아고 얘기를 꺼냈을 때, 주변에서 같이 가자고 하는 지인들이 꽤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출국 날이 다가오니까 한 사람 두 사람 떨어져 나가더군요. 가지 않아도 될 핑계를 찾고 있는 듯 보였어요. 떠나고 싶다는, 떠나야 한다는 그런 절실함이 없는 사람은 작은 장애물 앞에서도 쉽게 계획을 변경하곤 하지요. 결국 남은 건 저 혼자였습니다.”
800km 넘는 거리를 꼬박 36일 동안 외롭게 걸었다. 하루는 20km, 체력이 좀 된다 싶은 날에는 50km 넘게 걸었다. 어떤 날은 길이 먹고 자는 숙소가 되기도 했다.
처음 길에 들어섰을 때는 낯선 풍경에 저절로 매료됐다. 길 양쪽으로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가 줄줄이 서 있었는데, 그게 신기하면서도 너무 예뻤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듣기 좋은 꽃노래도 3일이면 끝이라고, 계속해서 포도밭만 나오니까 슬슬 지겨워지는 거 있죠. 또 포도밭이네,하고 투덜거리는 사이 제가 태어나고 자란 그 공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고향은 제주도다. 관광지로 너무 유명한 천지연 폭포와 정방 폭포, 그 둘을 엮어주는 길이 어린 시절 그녀의 동네다.
“산티아고에서 800km를 걷는 내내 바다는 단 한 차례도 만나지 못했어요. 바다가 보고 싶었지요. 만약 제주도에 도보 여행자들을 위한 길이 있다면 이곳보다 훨씬 근사해 보일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산티아고 여행 길에서의 한 만남이 그 생각을 구체화하게 된 계기였다.
‘만만한 아름다움’ 품고 있는 제주의 자연
그 속에서 ‘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았다
자기보다 다섯 살 정도 어린 영국 여자였다. 두 사람은 산티아고의 한 길 위에서 만나 반나절을 함께 하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내 자신이 저절로 치유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건 그 영국여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챙겨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일상.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도 사람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쟁에서 벗어나서 느리게 한번 살아보기, 이것이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길 위에서 만난 두 여인은 서로의 깨달음을 행복한 마음으로 공유했다.
“그녀에게 말했어요. 5년에 한 번 정도는 산티아고를 찾을 거라고. 길을 걸으면서, 내 정신과 육체를 점검해 보겠다는 뜻이었지요.”
오랜 시간 길을 걷다 보면 놀랍게도 복잡한 생각들,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잡념들이 서서히 사라진다. 남는 것은 매우 단순한 ‘자아’다. 그녀는 이게 좋았다. 산티아고를 다시 찾겠다는 마음이 든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영국 여자 생각은 달랐어요. 자신이 경험했던 ‘치유의 길’을 영국땅에 꼭 만들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저한테 그러더군요. 너도 한번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솔직히 너희 나라에 그런 길이 더 많이 필요하지 않겠니?”
솔직히 귀에 거슬리는 제안이었다. ‘치유의 길’이 절실하다는 건 그만큼 치료받아야 할 사람이 더 쌓여있다는 얘기니까. 대화를 마치고 나니 오기가 생겼다. 그 오기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긴 했어도 결국에는 제주 올레를 탄생시킨 씨앗이 되었다.
제주도는 그녀의 표현을 빌자면 ‘만만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제주도에서 제일 높다는 한라산의 높이가 1950미터니까 ‘만만하다’는 그녀의 얘기에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캐나다의 자연은 감탄이 절로 나올만큼 아름답지만 사람을 약간 주눅들게 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만큼 웅장하죠. 하지만 제주도는 달라요. 제주도에는 360여개의 오름(기생화산으로 작은 동산처럼 보인다)이 있는데 높이가 150미터가 채 되지 않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 작은 동산에 올라가도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는 것. 제주 올레를 걷다 보면, 이 풍경을 천천히 느껴볼 수 있지요.”
올레는 단순히 눈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몸과 마음을 점검해 주는 치유의 공간이 되어주고 있다. 등을 돌리고 살았던 부부가 올레를 함께 걸은 뒤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기도 한다. 게임중독에 걸린 17세 아들과 제주올레를 찾은 아버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들과 10일 동안 올레를 걸으며 참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더군요. 17년 동안 해 왔던 얘기보다 훨씬 값진 시간이었다고 해요. 서먹서먹하기만 했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길을 걸으며 많이 풀어진 거겠지요.”
올레는 현재 19코스까지 만들어졌다. 하나만 더 생겨나면 제주도를 온전히 도보로 경험할 수 있는 길이 완성된다. 서명숙씨는 보다 많은 이들이 그 길 위에서 바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인생의 이면을 엿볼 수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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