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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빈동 전투를 기록하다, 김기홍 해병대

Myvan 2017. 7. 8. 12:57

월남전이 공식 종료된 지 30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이 전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전쟁이 남긴 후유증에 먼저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다양한 의견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공통분모가 있다. 아깝게 희생된 청춘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해병대 6대 전첩의 하나로 불리며, 월남전 중 가장 화려한 승전보로 기록되고 있는 ‘짜빈동 전투’. 이 전선의 화기소대장이었던 전 해병대 부사령관 김기홍 교수(목원대)도 “중대원 열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사람들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는 말로 당시의 사투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짜빈동 전투는 180명의 중대 병력으로 2000여명의 상대를 물리친 전설적인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군을 떠나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노병’은 짜빈동 전투의 첫 총성과 마지막 승리의 환호까지 모든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967년 2월 15일 새벽 4시부터 8시까지, 총 4시간의 전투였지요. 당시 우리의 임무는 낮에는 수색을 하고, 저녁에는 매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여러 중대가 각지 봉우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상대가 우리 진지를 노린 건, 우리의 병력이 가장 작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대는 제일 만만해 보였던 우리를 먼저 제거하고, 그 후에 포병대대를, 그 다음엔 미 사단을 차례로 공격할 계획이었지요. 이른바 3단계 작전이었습니다.”

상대의 작전은 1단계부터 허물어졌다. 진지를 끝까지 지켜낸 180명의 용사 때문이었다. 진지를 완벽하게 구축하는 데 걸린 시간은 약 3개월 반. 이제 전쟁 준비가 다 끝났다 싶을 때, 상대는 그때부터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접근하는 적은 포로 제압하고, 근거리의 상대에겐 소총으로 응수했지요. 그러다 적들이 진지 주변 철조망을 폭파시키고 들이닥치는 상황까지 오게 됐습니다. 그때의 폭격으로 진지 3분의 1정도가 훼손됐고, 육박전이 시작됐습니다.”

처절했던 육박전은 30분간 이어졌다. 그러나 용사들에게 이 30분은 영겁과도 같았다. 한차례 폭풍우 같은 싸움이 끝난 후에도, 용사들은 지치지 않았다. 그들은 무모해 보일 만큼 용맹했다. ‘화기소대장 김기홍 중위’는 특공대를 조직해 적진 한가운데를 돌파했다. 상대는 퇴각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아군의 전투기가 짜빈동 전투의 영웅들을 돕고자 나섰다. 처절했던 전투는 끝났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전 중대원은 일계급 특진했고, 당시 김기홍 중위는 충무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월남에서 돌아온 후에도, 김기홍 현 목원대 교수는 줄곧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93년 말에 해병대 준장으로 예편했다.

“그때 인생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제대 6개월 전부터 본격적으로 간증 활동을 하기 시작했지요. 벌써 15년이 흘렀네요.”

짜빈동 전투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김기홍 전 장군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98년 3월부터 대전 목원대학교 교수로 달라진 삶을 살고 있었다.


*이 인터뷰는 2008년 8월 16일에 작성된 것입니다.